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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살롱 사건의 배후?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고백

 

 

약 30여년의 수감 생활 중이던 조직폭력배 두목, 김태촌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한 가지 진실을 알리고자 했는데


그가 알리고자 했던 건 자신이 긴 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악명높은 폭력조직이었던 서방파를 결성한 건 그의 나이 20대 후반 무렵


부친께선 갖가지 사업을 하셨지만 시작한 사업마다 모두 망했고 노상에서 품팔이를 시작하셨다. - 김태촌의 후기 중

어렸을 때 구두닦이도 해보고, 신문팔이도 해보고, 아이스크림을 메고 다니면 팔기도 하고, 장사도 해보고 하다가 결국 안되어서 청소년 시절부터 탈선을 했다는 그.

지금은 번화한 도시가 된 그의 고향
서방파라는 이름은 서방면이라는 김태촌 고향에서 유래

 


그렇다면 서방파는 어떻게 유명해지게 되었나?
김씨가 폭력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신민당 사건에 개입하고부터 였습니다.
신민당의 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수백명의 청년당원들이 벌인 난투극으로 유명한 사건.

당 대표에 이철승 전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김태촌
이후 그는 정치 깡패로 불리며 서방파의 세를 확장했는데,

이후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조직폭력이 가장 많이 생겨났던 시기가 된다.
그 중 '서방파', '양은이파', 'OB 동재파' 등은 3대 패밀리로 불렸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김 씨의 이름이 알려진 건 1986년 8월 14일 강남구에서 발생한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은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폭력조직이 저지른 살인사건 중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당시 현장에서 네 명이 죽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 폭력조직 간의 알력이 존재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맘보파'가 김태촌과 관련된 조직임이 드러나면서 '맘보파'가 저지른 다른 사건에도 김태촌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1986년 7월 26일, 인천 뉴송도 호텔 사장 피습사건

 

인천의 한 호텔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방에서 잠을 자다가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사건.


그런데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무렵, 서진 룸살롱 사건이 터지면서 조직폭력단체들의 실상이 밝혀졌고 그 와중에 김씨의 정체가 세상에 공개되자 황 사장은 그제서야 자신을 공격한 것이 김씨의 행동대원들이었으며 김씨가 범행을 지시한건 또 다른 배후인물의 청부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김 씨는 수배된지 2주만에 돌연 자수를 했던 것입니다.
수사의 초점은 김 씨가 정말 현직 검사의 청부로 범행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으로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김 씨는 황 사장의 주장은 박 검사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진술은 피해자의 주장과는 엇갈렸는데

황익수(사장)의 주장은 박 검사가 분명히 시켰기 때문에 김태촌의 부하들이 와서 범행을 한 거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박 검사의 협박을 받던 황 사장은 사건 전, 검찰에 박 검사의 비리를 폭로했다는데 그러나 아무도 그의 주장을 믿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공격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황사장은 대검찰청에 검찰총장 앞으로 진정서를 냈으며 예방 차원에서 비리를 단속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받아줬다면 자신도 무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 씨(김태촌)는 자신의 범행은 단지 존경하는 법조인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태촌은 징역 5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당시의 진짜 이야기를 제작진에게 전한 김태촌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사건이지만,
보호감호까지 선고받아야할 사건은 아니었다.
나는 어찌 보면 권력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뉴송도 호텔 사건'
나는 이제부터 그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 故 김태촌 수기 中

그는 왜 자수를 하면서까지 박 검사를 지켰던 걸까?

 

1980년 군사정권이 등장하며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

 

또한 폭력배 소탕 작전이 시작되며 김태촌은 수감되었었는데 김씨가 수감된지 5년째 되던 1985년 9월, 그가 있던 대전교도소에 한 명의 중년신사가 김씨를 면회옵니다. 그는 당시 현직 부장 검사였던 박 모씨.


고마운 마음에 김씨는 출소후 박 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친분을 쌓으며 매일같이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직간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서울
김태촌은 상황을 정리하고자 건달 체육대회를 개최
당시 새마을조기축구회 회장이던 박 검사의 주관으로 새마을축구대회로 포장된 그 날의 대회는 유명인사들까지 대거 참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축구대회가 훗날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는 것이 김태촌씨의 주장
축구대회가 끝나고 나니까 박 모 검사가 김태촌을 불러서 황 사장을 죽여라고 시켰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축구 대회 한 것으로 널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인데, 황 사장이 검찰에 제출한 진정서때문에 박검사가 조사를 받게 되자 김 씨에게 복수를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박 검사는 나에게 황사장을 살해한 뒤 그의 머리카락을 증거로 뽑아 오라고 했다.
머리카락이라도 씹어서 삼켜야 분이 풀리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박 검사는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축구대회를 범죄단체 결성으로 몰아 나를 구속시키겠다고 했다.

고 김태촌의 수기 중

김태촌에 따르면 호텔 사건으로 자신이 구속되더라도 끝까지 책임져 주겠다며 박 검사가 혈서까지 써주었다고
하지만 그는 박 검사가 약속을 어기고 사표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긴 수감 생활을 감당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들 역시 박 검사를 의심했지만 수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던 상황

 

박 검사는 김태촌의 주장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가 박 검사를 만나 직접 물어봤다는데


박 검사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김태촌의 수기

김씨가 전당대회때마다 부하들을 동원해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다고 밝힌 전 국회의원 유 씨.

나는 어떠한 권력의 힘이 필요할 때마다 유 의원님께 부탁드려 해결하곤 했었다.

 

5공 실세들을 주무르고 계신 파워였다.
어느 날이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김 의원은 내게 용돈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드리며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라고 했다.

수기 중에서

즉, 등장인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소 주관적이지만 그가 쓰고 있는 사건이나 관련인물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과 가깝다는 것입니다. 한 편 김 씨가 90년도에 재검거될 당시 그의 수첩속에는 수많은 유명인사와 지도층의 명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관계를 유지했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수 십년의 수감 생활과

병든 몸 뿐입니다.

2013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보스고 건달이고 조직이고 다 지겹다.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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