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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숨겨진 한국 사회복지의 그늘, 선감학원의 진실

 

소년 판 삼청교육대라 불리는 '선감학원'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1942년부터 40년간 경기도 안산의 선감도에 위치했던 '선감학원'
그 곳은 교화를 통해 자활의 기회를 준다는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기억을 달랐다고 하는데요.
이유없는 폭력과 강제 노역이 일상이었던 아이들.
수감된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음식조차 제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감학원을 나가는 방법은 성인이 되어 퇴소하거나 탈출하는 방법뿐이었습니다.
폭력과 배고픔으로 끝내 숨을 거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봉분도 없이 묻혔다는 선감학원 주변의 산 '우물재'


선감학원 유해발굴 조사결과, 인근에는 약 150구의 시신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

그런데 원아 대장의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4,600여 명의 원생 중 24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용된 절반 이상의 아이들은 고아도 부랑자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1982년, 공금 횡령과 아동시설 전문성 부족으로 선감학원은 문을 닫습니다.

7년 뒤, 선감학원의 진짜 존재이유를 세상에 알린 이하라 히로미스 씨
1942년 아버지를 따라 3년간 선감도에 머물렀다는 이하라씨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선감학원은 일제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는데..
선감학원이 지어진 1942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원생들이 받은 군사훈련과 황국 신민화 교육은 전쟁의 총알받이, 산업전사로 이용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 일제 치하의 조선땅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본사람들도 전쟁에서 수없이 목숨을 잃어간것도 사실입니다. 총알받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네요.)


태평양 전쟁의 소모품으로 수감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아이들.
해방 이후인 1946년 선감학원은 미 군정에 의해 경기도 사회과로 이관


당시, 경기도 사회과장이었던 김학묵 씨.
그런데, 일제가 선감학원을 세울 당시에도 경기도 사회과에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요,
결국 경기도는 선감학원 초기 설립부터 운영 주체였던 것입니다.
김학묵씨와 함께 한국 사회사업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받는 백근칠 씨.
그는 일제가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근무하다 선감학원의 부원장과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한국 사회사업의 1세대가 되었고
그렇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한국의 수용시설은 이어졌습니다.

 

시청 소감


▶ 일제잔재 청산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일제시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사실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공감하지만, 일제 시대 잔재 청산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현재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일제 시대는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왔습니다. 그 시절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일제의 일원으로 자라났고, 그 가운데는 관료나 군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광복 후(일제시대이후)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일제시대에 사회의 관료로 활동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일제의 잔재라고 하며 청산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일제시대의 잔재 청산이 아니라 일제시대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서 열심히 산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알고 싶다 《선감학원》편을 보고 느낀 소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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