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캣

누가 육영수를 쏘았는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행사장.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여러 발의 총성이 행사장에서 울렸고,  현장에서 체포된 저격범 문세광.
풀리지 않는 그 날의 유혹. 그날, 육영수 여사를 향한 총알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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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정황은 이렇습니다.
박 대통령의 경축사가 시작한 지 10여분이 흘렀을 때,
한 남자가 무대를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여러 발의 총성.

괴한은 현장에서 검거되고  이미 범인이 제압된 사건 현장에서 또 한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잠시 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 육영수 여사는 몹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그날 저녁 끝내 숨을 거둡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저격범은 재일교포 2세인 문세광.


그는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권총 탈취 후 일본인 여권으로 위장 입국하였다.

수사 결과, 문세광 배후는 북한과 조총련으로 밝혀진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약칭으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1974년 10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내란목적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 6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그에게
재판부는 모든 항목을 인정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합니다.

문세광의 사형집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의아한 점은 죽음을 각오하고 대통령을 저격했던 문세광이 자신의 석방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

 

의혹의 시발점은 1973년 8월 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불법공작을 벌여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수사를 독촉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김대중 납치사건 종결을 통한 다음날 벌어진 8.15 저격 사건.
테러리스트에게 총을 주고, 한국 사람에게 일본 여권을 주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여 순식간에 묻힌 납치 사건.


궁지에 몰린 일본은 특사를 보내 반한활동에 대한 규제를 약속하고..

한국 정부로서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한일외교라는 두 가지 숙제를 한번에 해결하게 되었다.
사건발생 4개월뒤, 범행 배후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세광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다.

박정희 정권이 사형집행을 서둘렀던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일본기자의 추측.
일본의 조총련을 해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통령을 암살하는 연기를 하려다가 진짜로 영부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미국기자의 인터뷰..

사건의 진범 논란

 

문세광의 범행에 또 다른 배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은 육영수를 쏜 사람이 문세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진범논란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문세광은 1차재판에서 자신은 육영수여사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


수사기록에 적힌 사건 정황

; 권총을 허리춤에 숨기고 행사장에 입장한 문세광은 총을 꺼내려다 그만 자신의 다리를 쏘고 맙니다.
 첫 오발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문세광은 무대를 달려나가며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문세광의 두 번째 탄환은 대통령의 앞에 방탄연단을 맞고 튕겨나옵니다.
세번 째는 불발, 그 다음 문세광의 총구가 향한 것은 육영수 여사였습니다.

문세광의 네 번째 흉탄에 쓰러졌다는 육 여사.


그리고 누군가의 발에 걸러넘어지면서 마지막 탄환을 발사한 다음 체포됩니다.
문세광은 불발된 실탄 하나를 제외하고 네 발의 탄환을 쏘았습니다.

 

 

사건 당시 발견된 증거물 중 육 여사를 관통한 탄환이 있었을까?


당시, 현장 증거물 감식을 맡았던 사람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과수 감식 결과에선 탄환의 정체를 찾을 수 없었는데요,
그러나 수사기록에는 육 여사를 관통한 탄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세광의 재판 당시 증거로 제출된 탄환은 5개로 증거목록에는 육영사 여사를 관통했다는 결정적 탄환이 빠져있습니다.

 

당시 수사는 전적으로 문세광의 자백에만 의존했었는데요,
이 사건의 가장 큰 의혹은 여기에 있습니다. 만경봉호에 승선해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조총련 김호령으로부터 거사자금을 받은 사실 등 범행 배후에 대한 자백이 시작된것은 8월 16일밤.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문세광이 자백을 시작하기도 전인 8월 15일에 이미 범행배후에 대한
구체적인 수사기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생방송 도중 일어난 비극적인 대통령 영부인 피살 사건.
수사는 많은 의혹을 남긴 채 종결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발표는 전부 진실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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