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항준
주요 배우 : 김승우, 차승원
총평 : 코믹한 연기가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강추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지만, 코믹한 상황 설정이 웃음을 자아낸다. 김승우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영화이고, 감독을 맡은 장항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아직 조연으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유해진의 모습과 지금은 유명해진 정우의 데뷔 초기 모습도 볼 수 있다.
장항준
1969년 서울에서 출생.
어릴 때는 운전기사와 과목별 과외선생이 있을정도로 좀 살던 집안에서 자라나 공부는 안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기만 했다. 그러다 고2때 아버지의 건설업이 망하고 재수하다가 서울예전 연극과에 입학. 자신이 무엇을 잘하냐 봤을때 보지도 않은 영화줄거리를 꾸며내던 학창시절이 계기가 되었다고. 졸업후 아는 형에게 일자리 부탁해 방송국 막내작가로 일하다 메인작가가 펑크를 내자 써놓은 자신의 아이템이 채택되면서 6개월만에 FD로 신분상승하였다.
SBS예능국에 작가로 있다가 친구 장진의 신춘문예 당선에 자극받고 영화계에 작가로 들어갔다. 이후 여러 영화사를 돌아다니다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의 각본으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후보까지 올라가는 성공을 맛보았다. 이어 김의석감독의 재기작 "북경반점" 각본에 참여하게 되나 최종각본은 각색으로 많이 바뀐 버전이었고 흥행까지 실패하며 쓴맛을 보게 된다.
이후 자신이 쓴 시나리오 "불타는 우리집"으로 입봉을 준비하다 결국 무산되고 당시 충무로의 대세 작가였던 박정우 각본의 라이터를 켜라로 데뷔하게 된다. 작가 출신이면서 남의 각본으로 데뷔한 셈. 억지스러운 설정의 조폭코메디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찌질한 백수를 실감나게 연기한 김승우와 당시 떠오르던 차승원의 연기, 백상 시나리오상을 받은 박정우의 각본과 오랜 예능으로 다져진 장항준 특유의 연출로 130만 관객을 동원하며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기차역 패싸움 촬영 도중 뜻하지 않은 인명사고가 생겨 장항준 본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다음 연출작은 자신의 각본을 가지고 김승우가 다시한번 주연을 맡고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김정은을 캐스팅한 "불어라 봄바람". 안 팔리는 짠돌이 소설가가 윗층에 세들어온 다방 아가씨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같이 글을 쓰게된다는 이야기로 야심차게 추석시즌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착한 코메디라는 컨셉은 좋았으나 이전작과 별다를바없는 인물을 연기한 김승우, 김정은의 이미지에 식상한 관객이 오! 브라더스나 조폭마누라 2로 발길을 돌린 것. 결국 난무하던 코메디 영화의 끝물에 올라타지 못하고 소포모어 슬럼프에 제대로 걸려넘어졌다.
"불어라 봄바람"의 흥행부진후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의 이야기인 "꿈의 시작"이나 돈떼먹은 사람잡으러 홍콩에 갔다 국제 첩보전에 휘말리는 이야기인 "메이드 인 홍콩"을 준비하였으나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 무산, 결국 TV, 라디오 패널로 출연하며 생계를 잇게 된다.
돌파구를 찾게 된것은 2010년 위기일발 풍년빌라. 원래 지상파를 목표로 하고있다 소재와 수위 문제로 거절당하고 적극적으로 드라마제작에 나서기 시작한 tnN에 편성되고 케이블로는 이례적인 완성도와 시청률을 얻으면서 성공. 뒤이어 야행성으로 예능샛별로 주목받으면서도 아내이자 풍년빌라 공동집필인 김은희 작가와 국과수를 배경으로 '하얀거탑+대장금'을 표방한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 드라마는 싸인.
싸인이 공중파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데드라인에 몰린 작가의 SOS에 더해 "촬영하면서 춥고 졸려서" 10회에 연출에서 물러나 극본을 도와야했고, 온전한 작품 감상까지 망쳐버린 마지막회의 방송사고는 '영화판은 여기 비하면 신사'인 드라마 제작현장의 험난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드라마인 드라마의 제왕에서 작심했다는 듯이 시청률 지상주의, 과도한 PPL, 쪽대본, 밤샘촬영, 작가교체, 편성전쟁과 돈 로비, 언론플레이, 연기력 논란등 방송계의 모든 부조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반부에 쉴새없이 쏟아지는 내부 비판 폭로가 후반부터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며 로맨스 중심의 불치병+해피엔딩으로 흘러가버린 절반의 실패를 기록했다. 2017년 기억의 밤 연출.
김승우
대한민국의 배우. 1969년생.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쌍칼'. 나름 멋진 캐릭터였으나 이 영화에 출연한 박상민과 신현준에 가려 부각되지 못하고, 군에 입대 하게 된다. (단기사병)
소집해제 후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조연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1996년 최진실과 함께 출연한 영화 고스트 맘마가 히트하면서 급기야 TV에서도 MBC 드라마 신데렐라 등을 통해 종횡무진 활약하며 주연급으로 성장한다. 2005년 김남주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젊었을 때는 신데렐라에서 재벌2세나 신 귀공자에서의 주인공 역이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지만... 요즘은 아이리스처럼 선 굵은 연기와 김승우의 승승장구와 1박2일 같은 예능에서의 친근한 모습까지 두루두루 보이고 있다.
1998년에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후, 가장 최근에는 2009년 아이리스로 중편드라마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리고 KBS 연예대상에서 본인 이름을 걸고 진행한 김승우의 승승장구로 2010년 신인상, 2011년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엔 1박 2일 시즌2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연예대상 엘리트 코스 트리플 크라운(신인상→우수상 →최우수상)을 달성한 전력이 있다.
차승원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원래 80년대말 패션 모델로 데뷔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남자 모델계의 레전드로 활약했으며 90년대 말부터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등에 출연하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한 쇼프로에도 빈번히 출연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재미있는 입담을 선보여 대중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게된다. 모델 출신 남자 배우들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 중 하나.
사실 당시는 남자가 모델한다고 하면 완전 정신병자 내지 게이 취급받을 정도로 인식이 안 좋은 시절이었기에, 모델계 입성 당시 단국대학교 사범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차승원은 담임한테서 빠따까지 맞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키가 안 닿으니 점프해서 뺨을 날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요즘 단대부고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선생은 그때 차승원 때문에 골치 아프긴 아팠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 일에 대해서는 차승원에게 미안해한다고.
연기생활을 시작한 것은 1997년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의 단역부터. 다만 이듬해까지는 영화계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98년에도 영화 출연작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조연이 전부. 그래도 방송 쪽에서는 상황이 달랐는데, 캐스팅이 영화 쪽보단 덜 까다로웠기 때문. 데뷔 직후부터 이듬해까지 이런저런 시트콤이나 드라마의 주조연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였으니, 바로 토크쇼였다. 1998년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에 보조MC로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김혜수의 플러스유까지 계속해서 연속해서 대박이 터졌던 것. 여기서 차승원은 특유의 입담으로 대중들의 뇌리에 본인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토크쇼의 맹활약 덕분에 연기자로서도 지위가 상승, 98년 후반기부터 99년까지 각종 TV 드라마, 시트콤 등지에서 주연으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영화 쪽에서도 99년 <자귀모>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중의 인식은 그냥 얼굴만 잘생긴 예능인 + TV배우 정도에 불과했고, 인기를 얻었다지만 필모그래피 자체도 얼굴만 강조하는 뻔하디 뻔한 TV 멜로드라마였을 뿐이었다. TV 쪽보다 까다로운 영화계에서도 이런 인식은 마찬가지였던 상황었고, 이 당시 차승원에 대해 발연기 운운하는 얘기도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 그냥 99년 후반기 이전의 차승원은 연기력 자체를 보여줄 무대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뭐 여기까지라면 그냥 잘생기고 예능감 있는 TV 연기자 내지 방송인 정도로 커리어가 흘러갔을 텐데.. 1999년 연말 개봉한 《세기말》에서 평가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에서 차승원이 자신에게 얼굴만 있는 게 아니라 연기력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당시 전문적인 평자들이 이 영화를 논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언급한 부분이 "차승원에게 저런 연기력이 있었는 줄 몰랐다"는 얘기. 덕분에 영화계에서 차승원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한 미남배우가 아니라 흥행력과 연기력을 갖춘 특급 유망주로 인정받게 된 것. 이렇게 되어 이듬해인 2000년 작품인 《신혼여행》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고, 같은 해 연말 개봉한 당대 최고의 블록버스터 《리베라 메》에서도 최민수, 유지태와 동급으로 지위가 상승했다. 특히 《리베라 메》의 경우, 대중들에게 배우로서 차승원을 처음 각인시킨 첫 작품이다. 《세기말》은 흥행에서 폭망했던 터라(...) 대중들에게 차승원의 연기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으니..
어쨌든 이런 차승원의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 모델출신으로 연기자나 얼굴로 주목받은 배우들은 부지기수이지만, 차승원처럼 데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연기력까지 인정 받은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충무로 특급 흥행카드가 되었다. 2003년 보디가드로 외도한 것을 제외하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근 십 년 동안 이런저런 흥행작들의 타이틀롤로 출연하였다.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가 차승원의 제1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로, 강우석감독이 운영하는 '시네마 서비스'에서 제작한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선생 김봉두》, 《귀신이 산다》등의 코미디 영화가 연속 대박 행진을 기록했다. 다만 문제가 없진 않았는데, 이 당시 필모그래피가 코미디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 데뷔 초창기 필모그래피는 코미디가 아닌 정극 연기였고 04년 이후로 코미디 편향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기를 시도했지만, 이 당시 커리어 탓에 코미디 전문 배우라는 선입견을 벗어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신라의 달밤》감독이었던 김상진이 당시에 전성기였고, 작품 내외적으로 차승원과의 가장 호흡이 좋았기 때문에 필모그래피가 자연스럽게 코미디 영화로 흘러갔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차승원 본인의 코미디 연기가 원체 뛰어난 점도 있다. 정말 서럽게 우는데 뭔가 웃기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연기가 일품이다. 이 당시 인터뷰에서 한 말이 꽤 화제가 되었는데,"처음에 연기를 하려고 했을 때는 '차승원 하면 연기 잘 하는 대배우'라는 평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은 "차승원 나오는 영화는 돈 내고 봐도 아깝지 않다'는 소리만 들으면 좋겠다."
이후 2005년 《혈의 누》에 출연하며 코미디 연기 편향에서 벗어나 필모그래피가 다양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2000년대 중반 이후 마땅한 흥행작이나 대표작이 없다는 게 다소 아쉬운 편. 폭망까지는 아니고 여전히 수요가 있는 배우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인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커리어에 다소 위기감을 느꼈는지 2009년부터 꾸준히 TV드라마 작품을 하고 있다. 이중 가장 히트작은 2011년 작 《최고의 사랑》이며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차승원의 연기는 각종 예능프로에서 패러디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아테나:전쟁의 여신이나 화정같은 망작도 있긴 하다. 드라마 쪽으로는 약간 부침이 있긴 해도 호성적을 거두고 있는 반면, 영화 쪽으로는 2000년대 후반부터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 중에 평가나 흥행 어느 한쪽이라도 좋은 성적을 거둔 작품이 없다시피 하다. 어쩌면 영화 시나리오 선구안이 좀 부족한게 아닌가 싶다.
박영규
1953년생.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태어난 그는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15살무렵에는 신문을 돌리다가 개에게 물리기도 했다. 막연히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 쪽으로는 전혀 인연이 없었고, 형편이 어려워 충남기계공고를 가야 했다. 기름밥 먹는 생활과 맞지 않았던 그는 고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국은 서울예전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76년 포병으로 입대했고 제대 후인 80년 본격적으로 대학로에서 극단 생활을 하게 된다. <공간사랑>이란 곳이었는데 대학 은사 오태석의 작품인 <1980년 5월>로 연기를 시작했다. 곧 오태석이 <극단 목화>를 창단하면서 창단 멤버에 이름을 올린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소품을 정리하는 역할로 시작해 연극배우로 총 7년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를 회상한 그는 회식 자리가 있으면 오태석 선생의 가방을 맡아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겸사겸사 그 날 연기에 대해서나 연기 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화여대 정문 옆 철길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고. 그 때 룸메이트들이 현재 <극단 76단>을 이끌고 있는 기주봉, 기국서 형제였다.
그러나 극단 생활이 흔히 그러듯 배고픔에 시달렸고, 심지어 도중에 폐결핵까지 걸렸다. 29세(81년) 9월 그가 묘청 역을 맡았을 때 체중이 42kg까지 줄고 무대에서 기절도 했다고 한다. 대전 어머니까지 상경해 간호를 하느라 집도 역촌동으로 옮겼다. 병원비를 댈 수가 없어 아픈 몸에 직접 책 외판원에 나서야 했다. 극단은 2년의 투병 기간동안 쉬었지만 외판원으로 매상을 꽤 올려 복귀 직전엔 영업부장까지 맡았다.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직접 엉덩이에 주사도 놓고, 모친은 약탕원에서 몸에 좋다는 것들을 고아다 먹였다고.
1983년 대학 후배와 결혼을 하였다. 폐결핵을 앓아 힘든 그를 간호까지 해가며 2년 열애 끝에 결국 결혼했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고 워낙 가진 것이 없어 자취방에 비닐 장롱하나 놓고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그 해에 드디어 아들을 얻는다. 그가 말하길 처가 어른들이 월남하신 분들이었는데 마음을 풀지 않으셔서, 나중에 애를 안고 찾아갔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83년 가정 생활로 건강을 조금씩 되찾으면서 연극 한만선(韓滿線)으로 복귀했고, 85년 MBC 베스트 극장 '초록빛 모자'에 서갑숙과 부부 역을 맡아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있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인기를 얻고 나서도 서갑숙을 그의 진짜 부인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86년 MBC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면서 연극판은 떠난다.
그러다 1988년 '내일은 잊으리'에서 야망에 불타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김희애를 묵묵하게 지켜주는 따뜻한 이미지로 대히트를 쳤다. 당시 가수 김종찬과 더불어 주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앨범 '카멜레온'을 발표, 하루 12개의 행사에 출연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89년 9월엔 MBC 수목미니시리즈 <당신의 축배>에서 고(故) 최진실과 로맨스 연기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그 뒤로 후속작이 터지질 않아 약 8년 가까이 침체기를 겪었다.
결국 94년 연극판으로 돌아온다. 은사 오태석이 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모노드라마였다. 온전히 그의 연기력으로만 1인극을 끌고가는 거였는데, 극단 목화가 대학로 흥사단 빌딩 지하에 상설 극장을 마련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생긴 것. 상설 극장 이름은 <충돌극장2>라는 이름이었다. 97년도에 폐관했다.
돈과 인기는 생겼지만 부부 관계의 위기를 겪었다. 96년에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곧 이혼했고, 1997년 3년 연상의 유명 디자이너 최경숙 씨와 재혼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맞는다.
거의 관(棺) 속에 들어가 있었던 그를 다시 끄집어낸 작품이 바로 1998년 3월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였다. 미달이 아빠 "박영규" 역할을 맡은 뒤로는 기존의 실장님 이미지에서, 얍삽하고 이기적이며 민폐를 잘 끼치면서도 밉지 않은 코믹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이불킥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만년 찌질이로 알려진 허봉구. 그는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역 화장실에 들르는데, 볼 일을 다 본 후, 깜빡하고 라이터(300원짜리)를 두고 나오게 된다. 뒤늦게 자기에게 라이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이터를 찾으러 다시 화장실로 가보니 왠 험상궂게 생긴 키 큰 남자(차승원 분)가 자기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라이터를 주은 사람은 다름아닌 조폭 양철곤. 그는 자신에게 빚진 국회의원(박영규 분)에게 돈을 받으러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봉구는 자기의 소중한 재산인 빨간색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기차를 타는 양철곤을 쫓아가기 시작하는데..
영화 <광복절 특사> 소개 (0) | 2020.06.08 |
---|---|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리뷰(스포일러 포함) (0) | 2020.06.07 |
영화 <아저씨, 2010> 소개 (0) | 2020.06.04 |
<영화> 이장과 군수 리뷰 (0) | 2020.05.28 |
영화 <선생 김봉두, 2003> 소개 (0) | 2020.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