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캣

달걀을 세운 사나이 - 콜럼버스

 

지구는 둥글다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서쪽으로만 가면 동양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콜럼버스는 유럽대륙에서 서쪽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고 마침내 아메리카의 바하마 제도의 과나하니라는 섬에 도착한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땅이 동양의 일부라고 확신했다. 인디언이라는 단어의 유래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처음에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최강 해운국이자 아프리카에까지 무역거점을 두고 있던 나라였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콜럼버스의 아이디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페인의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왕비 이사벨을 몇 년의 노력끝에 설득하여 그들로부터 신대륙 항해 지원금을 받아낸다. 콜럼버스는 노후한 세 척의 배를 이끌고 1492년 8월에 출발하여 두 달 만에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는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였고, 거기서 그는 더 항해를 하여 자메이카, 쿠바, 아이티 그리고 남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땅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였고, 결국 1506년 눈을 감을 때까지도 자신이 동양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으로 탐험가, 항해사이다. 그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럼버스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했던 이탈리아 천문학자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1397~1482)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였다.

 

 

 

 

유럽인 기준으로 콜럼버스는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사람들은 콜럼버스 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은 빈랜드로 유명한 랑스오메도스 유적의 존재로 아메리카 발견이 이미 입증되었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현 캐나다 동부)에 갔다거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 사이에서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며, 바스크인들이 어업,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고 심지어 콜럼버스조차도 자신의 항해일이에 이름모를 이에로 섬 출신의 사람이 카나리아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고 진술했고 같은 일지에 1484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면서 마데이라 섬의 주민이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육지를 언급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일지에 쓰고 있다.

 

 

ㄴ 랑스오메도즈 유적
ㄴ 랑스오메도즈 유적

 

 

위인전에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한 줄 알고 콜럼버스의 탐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 대항해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지구 구형론은 이미 확고하게 퍼진 상식 중의 상식이었고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 콜럼버스 vs '바다의 서쪽엔 낭떠러지가 있어 떨어져 죽을테니 못간다'는 당대 사람들의 대결구도는 19세기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소설의 묘사에 기인한다. 이런 잘못된 역사적 인식들을 '플랫 에러'라고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 발견된 사실이었고 콜럼버스의 시대에서 1700년도 더 전에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방법으로 지구 둘레의 계산까지 구한 기록이 전해진다. 측정의 오차야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학문과 기술의 미시적인 문제일 뿐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일화도 천동설에 대한 논쟁이었지 지구 평면설에 대한 논쟁이 아니었다. 간혹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을 동일시하여 천동설을 믿은 사람들을 지구 평면설도 같이 믿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아니다. 지구 구형론에 대해서는 중세 시대 종교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알마게스트의 주장을 토대로 하여 확고부동한 사실로 믿고 있었다. 애초에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에 퇴짜를 놓은 실제 이유는 콜럼버스의 매우 심각하게 틀린 거리 계산법 때문이다. 직선으로만 15,000km 정도를 틀렸는데, 유럽에서 아시아, 즉 일본과 중국까지의 거리인 19,600 km를 3,700 km로 줄여버렸다. 콜럼버스의 계산대로라면 미국이 있어야 할 위치에 인도나 지팡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으로 항해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완벽히 빗나간 계산을 가지고 항해를 한 것이다. 때문에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시아 탐험대를 여러 번 조직해봤던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 제노바 정부 입장에서는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이 맞지도 않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대규모 투자를 해달라고 징징대는 모습이 기가 차서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1차 탐험대 선원들이 정규 선원들이 아닌 죄수들로 구성된 이유도 이런 어처구니 항해를 했다가는 대서양에서 플라잉 카스테야노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정규 선원들이 항해를 거부하고 나선 결과물이었다.

 

 


콜럼버스를 반대한 사람들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콜럼버스 일당이 대서양 방향으로 가다가 인도는 고사하고 조선이나 일본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바다 위에서 말라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선박 규모와 항해 기술력으로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거나 하다못해 하와이나 이스터 섬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콜럼버스 선단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전멸하거나 선상반란으로 와해됐을 것이다. 후대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선단이 훨씬 더 큰 규모의 선단으로 항해를 했음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마젤란도 필리핀에서 원주민과 싸우다 죽은 뒤 수십 명의 사람들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한다면 콜럼버스는 운이 좋았다.

 

 


이를 두고 콜럼버스가 투자를 위해서 사기를 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차 원정대에 자신도 동행했고 언급했다시피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도한 곳을 인도로 믿은 걸로 보아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있었고 모든 증거가 여기가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콜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론을 살짝 수정하는데 '지구 구형론을 부인'해버린다. 정확히는 자신의 3차 항해일지에서 지구는 둥글지 않고 (서양)배 모양 형태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 어처구니 없는 이론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지 않았고,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지구 구형론에 따라 아시아가 생각보다 넓었거나, 혹은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또 다른 대륙이 아닌가하는 가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마저도 콜럼버스는 틀렸고 당대 사람들은 옳았다.

 

 


이후 이탈리아 항해사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 때 콜럼버스가 도착했던 육지를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으로 선포할 때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대륙의 이름은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라고 이름지어졌는데, 당대 유행한 어느 책에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의 발견자라는 헛소문이 돌았고, 당대의 지도학자가 그 책에 낚여서 대륙이름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것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닌 리처드 아메리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거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에 오기 2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나오고, 당시 지명은 사람의 이름이 아닌 성에 따라서 짓는다는 것. 하지만 근거가 빈약하여 현재 아메리카의 어원은 베스푸치로부터 온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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