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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1993) 리뷰 : 장국영                  

 

감독 : 첸 카이거

주연 : 장국영, 공리, 장풍의

개봉 : 1993. 12. 24

재개봉 : 2017. 03. 30

            2020. 05. 01

 

 

어렸을 때부터 함께 경극을 해온 ‘두지’(장국영)와 ‘시투’(장풍의).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아우와 형이지만,
‘두지’는 남몰래 ‘시투’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시투’는 여인 ‘주샨’(공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두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데… 

사랑과 운명, 아름다움을 뒤바꾼 화려한 막이 열린다!

 

 

 

지금은 사망한 중화권 스타 장국영의 걸작 패왕별희입니다. 

 

배우 소개

 

장국영(1956. 9. 12 ~ 2003. 4. 1)

 

홍콩의 배우이자 가수.


장국영의 한자 표기는 張國榮(간자체로는 张国荣). 영어로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다. 레슬리 라는 이름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애슐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성적인 이름이라 마음에 들었다고. 광동어식 예명을 살려서 Leslie Cheung Kwok-wing(레슬리 청궉윙)이라 하기도 한다. 홍콩 영화계를 빛낸 여러 스타들의 동판이 있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는 한자와 영어 이름만 있어서, 그의 영어 이름과 한자를 모른다면 못 알아보기도 한다. 레슬리(Leslie) 이전에는 바비(Bobby)라는 예명을 썼다. 언론에서는 표준중국어의 표기법을 따라 장궈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장국영 내지는 레슬리 청이라고 부른다.

 

 

'홍콩직물왕' 이라 불리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알프레드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American Pie>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R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나 대중들에게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덕분에 1977, 78, 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딱히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R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장국영 큰누나 장녹평


1983년, 홍콩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장국영 본인은 스탭진이 알려준대로 그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지 못했던 장국영은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굴욕들을 발판삼아 그 다음 해 부터 장국영은 <MONICA>로 기어이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맞게 된다. 또한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과 《금지옥엽》의 주제가 <>를 작곡하고 히트시켜 대만 금마장홍콩 금상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후에도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직접 대부분을 작곡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장국영은 가수로 먼저 성공한 탓에, 중화권에서는 장국영을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워낙 가수로써도 레전드고, 배우로는 두 말 하면 입아플 정도.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범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 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전 매니저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기 편도 하나 없었을 뿐 더러,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쥴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특히 가수로 복귀한 후 발매한 《총애 장국영》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50만장 이상 팔렸던 엄청난 히트작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은 콘서트 투어를 하거나 꼭 크게는 아니더라도 미니 콘서트처럼 한국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당시에는 비싼 표를 사서 콘서트를 관람한다는 것에 낯선 한국인들이라 매니저 진숙분은 수익성이 없다며 2000년 열정 투어에서 빼버린다.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결국 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보통화와 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투유노래 링크

www.youtube.com/watch?v=XH3uRbwufoM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와 합동 공연을 했고,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정식적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RTV와 계약하지만, 방송국과 영 조합이 맞지 않았는지 그에게 약 6~7년 간 무명기간이 존재한다. 전 매니저인 '진숙분'은 TV에서 우연히 장국영을 보고,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열심히 하는 게 맘에 들어" 그에게 협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본다. 물론 이 성공이 '우연히 좋은 매니저 만나서 된 것'은 아니고, 당시 화성레코드 소속이었던 매염방을 포함한 가수들이 비행기 타고 각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스스로를 홍보한 결과이다.

 

매염방과 진숙분이 회고하기를, 당시에는 "행사 뛰는 것=밤무대"였고, 소속사는 하루에도 스케쥴을 마구잡이로 돌렸다고 한다. 덕분에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장국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그러한 스케쥴을 더욱 더 힘들어 했다고 한다. 매염방은 그런 그를 위해 비행기 의자 밑에서는 자신이 자고, 장국영은 의자 위에서 자는 배려를 했고, 장국영은 어둠과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매염방을 위해 방 두개가 뚫린 방을 예약하곤 스탠드를 약하게 켜서 그녀를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 또한 높이게 된 것이다.

 

가장 왼쪽 : 장국영의 아버지, 그 오른쪽 : 장국영


<풍계속취>는 가수로써 장국영을 메인으로 올려놓을 만큼 히트한 곡이지만,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11위를 하는 바람에 상을 타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여 칼을 갈고 나온 노래가 1984년 <MONICA>. 진숙분이 상을 못타 분해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 원곡의 판권을 사서 그에게 어울리는 홍보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초대박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음악들은 가요 시상식에서 반드시 수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고, 특히 1987년 나온 《Summer Romance》의 판매량은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천녀유혼》 삽입곡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수면>이라는, 장국영 본인 입으로 '가장 히트한 곡'으로 언급한 곡도 포함되어 있다. 장국영 본인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 목표로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언급했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가수'라고 하였을 만큼 장국영에게 음악은 메인이요, 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 상 해야하는 덤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수 부문에서 후에 레전드를 찍는 장학우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부러워했고, 장학우 역시 장국영의 연기력을 부러워하여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장학우는 2002년 즈음부터 장국영 사망 직전까지, 우울증을 겪는 그를 위해 자주 그의 자택으로 가서 어울렸을 만큼 장국영에게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여튼 목표였던 가수로써는 레전드를 찍었고, 《영웅본색》의 OST인 '당년정', '분향미래일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유명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가수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중화권에서는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으로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을 꼽을 정도이다.

 

영웅본색 OST

www.youtube.com/watch?v=ETq0rVrz-KQ

 


1985년부터 가수로써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은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이며, 제목에서 아예 (장국영의)라는 걸 붙여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홍보를 할 정도였다. 후에 장국영은 <위니종정>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동업자와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장국영의 물건들, 팬들의 방문 흔적들로 장식이 되어있었거니와, 종종 장국영이 와서 팬들과 간이 팬미팅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배우로서 《영웅본색》과 《천년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이 두 작품을 장국영의 가수 성공 후 주욱 이어진 인기의 연장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장국영이 '얻어 걸린 것'이기 보다는, 오우삼 감독이 장국영의 잠재력을 보고 1983년에 이미 《영웅본색》에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천녀유혼》으로 인한 폭발적 인기 역시 9개월 간을 밤샘 촬영하여 고생하였던 것에 대해 보상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상까지 탔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상복을 생각하면...오죽하면 1988년 콘서트에서 "혼자 상을 못받았다"며 약간 투정부리듯 말하기도 했다.

사실 장국영은 웬만한 메인 시상식에서는 한번씩 상을 탔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수의 최고 명예인 금침상도 1999~2000년이 돼서야 받았고, 인터뷰에서도 "당신의 금침상은 10년 전에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닌가요?"라며 기자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장국영은 2002년, <명보>사에서 신설한 <연예동력대장> 시상식에서 《이도공간》으로 첫 수상자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장국영에게 알리자 "나랑 친해서 준거 아니냐?"라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일약 유명스타가 된 이후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홍루춘상춘》은 삼합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찍었고, 그 뒤로 《갈채》, 《실업생》, 《연분》 등등으로 이어지는 청춘물은 본인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돈이 필요했기에 들어오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다만, 1980년 RTV에서 방영했던 이벽화(릴리안 리) 작가의 아가적여인과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 열화청춘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갖는다. 바로 《아가적여인》을 보고 담가명 감독, 그리고 왕가위 감독이 장국영에게 꽂혔다고 밝혔기 때문. 당시의 미남 기준으로는 좀 다른 방향으로 귀공자, 꽃미남 스타일에 연약한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실 장국영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는 당시에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열화청춘》은 제 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에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품이기도 하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물론 왕가위 감독과 '첸 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왕가위 시리즈의 첫 도입을 《아비정전》으로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으며《패왕별희》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은 항상 시나리오를 쓸 때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고 밝혔는데 장국영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투게더》 역시 사실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하였는데, 장국영이 홍콩 콘서트 때문에 본인 분량을 먼저 찍고 가버려 보충이 안되는 상황. 분량의 모자람은 왕가위 특유의 질질 끌기 때문이었고, 결국 주연이 뒤바뀌어 버린다. 장국영은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서 약 열흘간 늘어진 자신의 분량을 연기한다.

첸 카이거 감독은 장국영 사망 뉴스를 접하고,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패왕별희의) 데이 아닌가." 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앨범 풍계속취 표지


색정남녀》는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사실 영화 자체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화가 거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거칠고 서툰 느낌나는 연출이 오히려 이 영화의 메인 줄거리인 '3급 영화 찍기'와 많이 어울렸으며,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적당한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꽤나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당시 장국영 말고는 다들 신인이었고, 심지어 촬영감독으로 나오는 분은 진짜 촬영감독이었다고. 지금은 중화권 대스타가 된 서기와 개성있는 연기자로 큰 막문위는 이 작품이 첫 데뷔작이었고. 한마디로 배우 쪽에서는 장국영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는 상황. 그는 감독 연습에 의의를 두어 촬영장에서도 연출부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인연으로 1996~1997년 콘서트에서는 서기와 막문위가 특별 게스트로 나와 섹시하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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