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캣

[꼬꼬무 7회] 무등산 타잔 박흥숙

 

가난했지만 성실히 살았고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청년의 이야기

 

1977년 4월 20일, 한 남자가 건장한 체격의 4명의 남성들을 커다란 망치로 살해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의 이름은 박흥숙.

그는 신문에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산을 잘타고 엄청난 괴력의 사나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광주의 무등산 해발 450m에 위치한 덕산골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4남 1녀 중 둘째였는데요, 그가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곧이어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안의 장남이 된 12살 박흥숙

박흥숙은 전교 1등을 거의 놓친 적 없던 수재였습니다. 가장의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네요. 그리하여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수업료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아 중학교 진학은 포기했습니다.

 

박흥숙의 가족은 1971년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광주로 오게 되었는데요, 박흥숙은 광주 시내 철공소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구했지만, 문제는 그의 여섯 식구가 살 집이었습니다. 학비도 없었던 그의 가족이 광주 시내에서 집을 구할 수는 없었는데,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산속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박흥숙은 산골에서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직접 짓기로 결심하였는데요, 가로세로 3m에 방 한칸, 부엌 한 개가 딸린 움막을 60일에 걸쳐 짓게 됩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박흥숙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

검정고시 합격후 박흥숙이 준비한 또 하나의 시험 : 그것은 사법고시
"국가 정의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게 그의 꿈이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검사가 되고 싶었던 박흥숙은 일도 그만 두고 하루에 20시간씩 공부했다고 합니다. 

 

사시합격이 절실했던 박흥숙.
그는 왜 살인마가 되었는가?


1977년 4월 20일
그 날 박흥숙은 점심을 먹고 며칠 전부터 해온 '작업'을 시작합니다.
집 근처에 땅굴을 파고 있었다!

같은 시각 김 씨를 포함한 구청직원 7명은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있었는데, 그들은 구청 건설과 건축지도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망치부대라고 불리는 철거반원이었던 것.

박흥숙의 집을 포함하여 무등산 덕산골에는 무허가 움막집이 20여채가 있었는데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무등산 덕산골
불법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묵인해왔던 정부

 

왜 하필 1977년 4월 20일에 갑자기 철거에 나선 걸까?

그것은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인데, 무등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할 예정이었던 것.
그 케이블카가 지나가는 방향에 박흥숙의 움막이 보였고 게다가 6개월뒤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될 예정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77년 10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광주 전국체전에 참석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당시 헬기 시찰을 즐겼던 박정희 대통령은 하늘 위에서 개발 현장을 보면서 마음에 안 드는게 보이면 철거할 것을 지시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무등산의 움막들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각 움막들의 주민들에게 철거를 고지하고 이사를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박흥숙은 그 움막이 철거되기 전에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그 날도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

어느 새 망치부대가 박흥숙의 집 앞에 도착해서 공무집행을 시작했습니다. 박흥숙과 가족은 담담하게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갑자기 철거반원 중 한 사람이 같이 온 직원들에게 움막에 불을 지르라고 이야기를 하고 놀란 박흥숙은 제발 불은 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직원은 알겠다고 하면서 철거를 진행하는데, 어디선가 타오르는 불길.

불을 지르지 않겠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 집을 부수기만 하면 또 지을가봐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박흥숙의 어머니가 불타는 집으로 뛰어 가기 시작합니다.
움막 천장에 현금 30만원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식모살이 3년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
불길로 뛰어드는 어머니를 제지했던 철거반원들

전부 불에 타버린 움막집. 박흥숙은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흥분한 동생에게 철거반원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며 달랬던 그.
그는 철거반원들에게 다른 집들은 제발 불을 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주변에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움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니 불만큼은 지르지 말아달라는 것.

 

그런데 얼마후, 연기가 계곡 위쪽에 피어오릅니다. 박흥숙은 급히 그 쪽을 향해 달려갔고, 그 곳에서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의 움막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박흥숙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철거반원 5명을 제압해버립니다.
그들을 끈으로 묶은 박흥숙은 불을 지르라고 시킨 사람이 누군지 묻다가 또한 거칠게 항의하는 직원들을 망치로 살해하고 맙니다. 5명중 4명은 사망했고, 1명은 중상을 입고 살아났습니다.

 

자신의 움막이 불탔을 때 참았던 박흥숙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어졌던 것 노인의 움막을 불태웠을 때.
움막집이 불타는 걸 보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편, 그 날 죽은 피해자들은 대부분 구청에서 고용한 일용직.
그들도 그 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등산에 올랐던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철거는 해도 불을 지른 적은 없었는데, 그날따라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불을 질렀던 철거반원들.

경찰에 자수하여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박흥숙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죗값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박흥숙의 범행


그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저의 지난 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때문에 아깝게 희생되어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 방 한칸 의지할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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