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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지강헌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이야기는 1988년 10월 16일에 시작됩니다.
서울올림픽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TV에 생중계까지 된 사건


그날은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북가좌동에서 생중계된 인질극

권총을 든 남자와 겁에 질린 여자가 있었다.
남자가 총을 쏘고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바로 그 사건
특이한 것은 인질범이 경찰에게 요구한 사항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듣고 싶다고 한 것. 그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 지강헌이었습니다.

 

1988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름 지강헌.

그리고 지강헌과 함께 있었던 3명의 인질범


안광술, 한의철, 강XX
이 세명은 20대초반의 어린 나이였고..

당시의 인질극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는데요,
특공대와 경찰 천 여명이 집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집 주변 골목길은 취재진과 동네 주민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난리통 속에서 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냅니다.

 

이 사건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인질극이 벌어지기 9일전,

1988년 10월 08일
중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
미결수 스물다섯 명을 태운 호송버스가 있었는데,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 공주 교도소로 죄수들을 이감 중이었습니다.


안성톨게이트 부근, 갑자기 일어난 한 명
"교도관님 저 소변 좀 보고 싶습니다."

교도관이 소변통을 건네는 순간, 버스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일제히 일어나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죄수들에게 점령당한 버스
결과적으로 죄수들과 교도관들은 옷을 바꿔입습니다.

그렇게 호송버스를 탈취해 안성에서 서울 서초동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버스 안의 25명의 재소자 중 13명은 '안전한 감금'을 선택하는데요,
나머지 12명은 범죄내용이 담긴 재소자 신분카드를 찢은 뒤,
권총 1자루와 실탄 5발을 챙긴 후 탈출을 합니다.


1988년 10월 8일 탈주 당일,
전국은 미결수들의 탈주로 인해 비상사태가 됩니다.
이 탈주범 열 두 명 중에 2명은 당일 검거가 되고,
3명은 룸싸롱에 가서 술을 마신 후, 취한 상태에서 종업원에게 칼을 들이밀고 자신들이 탈주범이라며
협박을 합니다. 겁에 질린 주인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 3명 역시 현장에서 검거됩니다.


이 세 명이 잡혀감으로써 술집 사장은 600만원을 받았다고..
(탈주범 1인당 200만원씩)


남은 탈주범은 7명.
그런데 이 7명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는데요,


탈주 3일째 되던 날에 드디어 경찰서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탈주범이 어젯밤 우리 집에 묵고 갔어요"


탈주범 7명 가정집 침입
신고한 곳은 안암동의 한 '가정집'
새벽 2시경, 열려 있는 대문을 통해 들어온 탈주범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시민들은 곳곳에서 반상회를 열게 됩니다.
그런데 행당동에서만 반상회가 열리지 않았는데, 하필 탈주범들이 행당동으로 향했던 겁니다.


이처럼 탈주범들이 가정집으로만 이동한 것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찰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도주방법이었는데요,


그리고 그 다음 도주로는 시내의 한 대학병원.
당시 35살의 인질

 

세 번째 인질숙박, 문정동


이 곳에서 집 주인과 인질범들은 술을 마시고 속깊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탈주범들의 맏형은 지강헌(35)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죠.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교를 다닐 적에 월사금을 내지 못해 선생님들한테 많이 혼났었다고 합니다.
또한 도둑질을 하고 처벌받고를 반복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꿈은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

지강헌은 자신이 탈주를 하게 된 이유가 대한민국의 비리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탈주범들의 목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이 있는 연희동이었습니다.


한 편, 지강헌의 죄목은 공범 2명과 7차례 현금, 승용차 등 556만원을 강탈한 것이었습니다.
지강헌은 7년형을 선고받았고, 보호감호 10년을 추가로 받은 상태였는데요,
보호감호는 보호관찰과는 달리 형무소에서 10년을 더 있어야 하는 그러한 제도였습니다.

<보호감호제도> :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범죄자를 본형을 마친 후 별도로 감호소에
머물도록 하는 죄

그런데, 이 보호감호제도를 만든 사람이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지강헌은 보호감호제도로 인해 10년형을 더 추가로 받았는데,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은
76억을 횡령하고도 7년밖에 선고받지 않은 점을 부당하게 여긴 것.

 

지강헌 556만원 17년 VS 전경환 76억원 7년

그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탈주 7일차, 신촌 한 복판에서 경찰에게 발각된 지강헌 일당
탈주범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경찰

1명은 즉시 검거, 1명 도주, 나머지 4명은 인파 속으로 도주

이제 네 번째 집에 탈주범들이 들이닥치게 되는데,
방금까지 TV로 보던 탈주범이 눈앞에 서 있는 순간,
그녀는 22살의 여대생

집에 있던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탈주범들에게 건넨 첫 마디
"밥은 먹었냐? 이 사람들에게 밥을 차려줘라"

 


가족들은 어떻게 하면 탈주범들을 순순히 나가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그렇게 의미심장한 1박 2일을 보내고
탈주범들은 드디어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흐르던 북가좌동으로 향하게 됩니다.

1988년 10월 16일


탈주범들은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인질을 해칠 것이라고 위협을 했는데요,
인질범들의 가족까지 온 상황.


지강헌 일당은 무시무시한 인질범이었지만,
담 밖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지강헌은 승합차를 요구합니다.


그는 승합차를 보내주면 인질을 보내주고 조용한 곳에 가서 우리 운명을 결정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인질범 중 한 명인 강씨가 나오고, 차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과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 지강헌은 그에게 인질극의 현장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리고 집 안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
지강헌의 총을 빼앗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탈주범 2명

이제 체념한 지강헌이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듣고 싶다는 말을 경찰에게 하고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눕니다.
지강헌이 유리를 집어들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 순간에 경찰특공대원들이 들이닥쳐서 지강헌한테 총 두 발을 발사하고 맙니다.

병원에 옮겨진 지강헌은 4시간 후 사망했다.

그 다음 해 89년 5월에 선고공판이 진행됩니다.
북가좌동 인질범 4명 중에 유일한 생존자 강 씨
징역 15년 구형에, 7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거쳐갔던 가정집 중 세 집에서 인질범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10월 11일 새벽은 잊을 수 없습니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알고 있는 교도소 탈주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습니다.
...

전국적으로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져오게 한 이들 모두는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들에게서 나쁜 범죄자의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

아울러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솔직히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습니다.
..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삼아 세상의 좋은 등대지기가 되게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 인질의 탄원서 中


최고의 협상은 마음을 읽어준 한 마디

유전무죄 무전유죄

어찌보면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2년 범죄자의 말이 왜 아직까지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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